영화의
욕망은 단순했다.
삶은 보수적이었다.
(원작의 영향이 컸다.)
하지만
영화는 숨을 조여왔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컷과 컷 사이에 발현되는
압축과 생략에 의해 발생되는
어떤 감정을 느끼는데 묘미가 있다.
'화장'은 지극히 일반적인 현실 속 한 인물을 주도면밀하게 담는다.
이는 감독의 이전의 작품과 다른 테마에 속한다.
영화는 일상을 담기에
씬들은 느슨하게 연결되고 화면은 여유롭다.
하지만 '화장'은 감독의 예전 작품들보다 컷과 컷 사이의 밀도가 높다.
마치 사무엘 베케트가 말이 사라지게 함으로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려고 했던
접속 및 운각의 지점처럼.
서늘한 기운이 있다.
예를 들어보자.
회식자리.
주인공 남자가 좋아하는 여인이 숙성된 와인을 설명하는 장면이 있다.
주인공 남자는 술에 취해 한 팔로 자신의 머리를 기대 졸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주인공의 얼굴을 클로즈업 하면서 실제로 남자는 여자의 말을 최대한 집중해서 듣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는 단지 주인공 남자의 욕망을 보여주는 것인가?
중요한 건 다음 장면.
여인은 춤을 춘다.
하지만 카메라는 여인을 현실적 거리가 느껴지는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꿈을 꾸듯 여인을 아주 가까이에서 유영하며 바라본다.
그 장면에서는 주인공 남자의 얼굴은 보여지지 않는다.
카메라는 주인공 남자 그 자체가 된다.
그리고 다음 장면.
주인공 남자가 귀가를 위해 택시를 잡는다.
숏은 앞 장면과 달리 너무도 일상적이고 욕망이 완전히 사라져 있어 당황스럽다.
그런데 남자가 택시를 탄 후 다시 차장 밖을 보면 사람들 속 여인은 자신만 바라보고 있다.
화면은 다시 그녀 가까이서 유영한다.
남자는 급히 택시를 돌리지만 여인은 보이지 않는다.
남자는 택시에 내려 허탈하게 벤치에 앉는다.
이때 남자의 물리적 존재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왜?
욕망의 감정은 너무도 강렬하게 스크린에 활보한다.
하지만 현실의 실재는 도시의 이미지와 함께 스크린에 묻힌다.
여기서 우리는 발견한다.
스크린에서 살고 있는 것은 감정이며 죽어 있는 것은 실재이다.
부재한 실재들.
현재한 욕망들.
영화 '화장'은
거의 모든 컷들을
실재들을 부재화 시키고
부재들을 실재화 시킨다.
영화는 그 컷들을 각기 다른 운각으로 만들고 예리하게 접속시킨다.
운각의 접속이 영화의 운율을 발생시킨다.
그리고 접속의 미세한 틈에서
서늘한 하나의 감정이 생성된다.
그것은 실재들 속에서 계속해서 부재되어가는 죽음의 감정이다.
우리는 매일 사진을 찍어 sns등에 올리며 자신을 실존 시키지만 그럴수록 실존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현실화되지 못하는 실존들.
(장 보드리야르의 사라짐에 대하여를 참조하셔도 좋을 것 같다.)
영화 '화장'은
'revivre'(화장의 영문 제목)에서 오는 '소생'에 방점을 두기위한 평범한 영화가 아니다.
영화 '화장'은
지금 현실 세계에서 '사멸'되어가는 인간들을 적나하게 드러내는 부조리한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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