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30일 월요일

<안드레이 루블료프>, 정성일 평론가의 시네마 토그를 듣고 난 뒤 기록

믿음으로 보는 것

이미지와 사운드를 동사의 형식으로 총체적으로 담는 것

3시간 30분동안 쉬지 않고 서서 영화에 대해 간절하게 고백하는 것

그리고 오늘 내가 하는 연극에 대해 생각하는 것


믿음으로 보는 것 > 동사로 촬영하는 것 > 소리를 오브제하는 것(사운드 스케이프)


타르코프스키는 문학적 비유를 하지 않으려 함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잉태해야 함

그건 광기를 기록하는 것

예를 들면,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지가 아니라 바람을 찍는다

광기는 숭고와 연결되어 있음


두 개의 미장센

보이는 온 프렝임의 이미지 미장센

보이지 않는 오프프레임의 사운드 미장센(타르코프스키는 공명과 반향을 느끼는 사운드만 사용했다)


반 밖에 찍을 수밖에 없는 롱테이크와 그 나머지를 찍을 수 없는 사운드

이 둘의 총체성을 타르코프스키는 담으려고 했다

이 것이 바로 '시간의 각인'

그리고 광기의 기호학 찾기

변증법적인 방법(구심력)이 아니라

복음적인 방법(원심력)으로


칼라그라이데이션

빛과 어둠 사이의 어둠에 어둠이 또 있음

여러 어둠의 레이어

이게 사운드와 만나 총체성을 이끈다

타르코스키는 이 모든 것이 선물이 되길 바랬다

서로 활동하는 모든 것을 담는 총체성


2025년 6월 23일 월요일

폭포

아침에 폭포가 흐른다

차 소리일까

아니면

하수구 소리일까

환청인가

새벽 3시에 잠이 깨어 여태 깨어 있다


폭포의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소리와 소리 사이에 빈 자리가 있다

그 빈자리가 소리를 떨게 한다


삶은 왜 이어지지 않고

끓기는가

그 빈자리 속에 

난 무슨 소리를 내고 있는 걸까


2022년 11월 22일 화요일

계단

가슴에 계단이 있다면


죽은 자가 피를 흘리며 넘어져 간 길이었을




누가


혼자




창을 열어봤어


아무도 보지 않았어 늘




펜이 있어 써 본다


계단에서 보았던 나




흐린 날은 구름도 없어


밤에도




어둠 속 골목 속 계단




난 그곳에서


난 그곳으로부터




빛은 빛나지


하지만 난 그 계단에서







금방 써 본 글입니다.

우울하자고 쓴 글은 아닙니다.

슬퍼서 미안해서 쓴 글입니다.

하지만 오늘까지만 이렇게 전하겠습니다.

이해해주실 거죠? ㅎㅎ

늘 감사합니다.


2019년부터 이어 온 이 작품의 길을 위해 정진하겠습니다.

2022년 1월 10일 월요일

그래도 된다

슬픔을 견딜 수 없으면

하루 정도는 죽어도 된다


죽으면 

곧 따라올 미련들이 사라질까


통째로 죽으면

나도 실패자로 불려질까


슬픔을 견딜 수 없으면

더이상 슬픔을 견딜 수 없으면

무엇을 봐야 할까


나는 언제 웃어보았을까

나는 언제 기뻐했을까

나는 언제 따뜻해보았을까


슬픔을 견딜 수 없으면

혼자가 될 수밖에 없다면

사라지자

차오르는 물 속으로

그리고

내가 있었다는 걸 지워버리자

남는 건

흐르는

파도같은 바람 뿐

2021년 9월 2일 목요일

과거의 인물을 지금, 여기에 있게 하는

요즘 연극을 보면 과거의 사건, 시간, 인물 등이 많이도 나온다.

특히나 다큐멘터리 연극의 유행(?)이 지나가서일까?

연대기를 기반한 작품이 많다.

나의 작품 <새들의 무덤>도 연대기를 기반한 작품이기도 하다.


극장에서 만나는 과거들은 낯설기도, 반갑기도, 그립기도 하다.

특히나 그 과거가 내가 살아왔던 시간과 겹쳐진다면, 그게 흥겨운 노래와 함께 한다면 박수가 절로 나온다.


대부분의 연극이, 그리고 특히나 과거들을 불러 오는 연극 작업들은 동시대를 거론한다.

동시대. 지금, 여기. 명확히 규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과거들이 지금, 여기, 관객들과 함께하는 극장을 공유할 때, 

연극은 동시대를 거론한 그 증거를 관객에게 인지, 혹은 감각되게 해야하지 않을까?


과거를 이야기 하지만 동시대를 있게 한다.

참으로 어렵다. 

하지만 창작자들은 고민하고 시도해야 한다. 

과거에 관객을 모시고 잔치만, 혹은 굿판만, 혹은 안전한 멜랑콜리만 선사하면 안된다.


이런 글을 접한 적이 있다.

'이야기에 리얼리티를 삽입한다.'

이 말은 그야말로 '허구'라는 것에 진짜 '리얼리티'를 삽입한다는 것이다.

쉬운 것 같지만 어렵다.

하지만 이 문장은

객석에 앉아 있던 관객을 자신들이 준비한 과거의 이야기에 참여 시킴으로써 지금 현재에도 그 과거가 진행되고 있다던가, 혹은 배우가 객석에 앉음으로써 자신들이 준비한 이야기가 객석에 앉은 관객들이 현재 겪고 있는 사건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연극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위의 방법은 창작진이 동시대를 고민하지 않았다는 명확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의 인물들을 배우가 너무나 리얼하게 재현한다던가, 메타적으로 접근한다던가 등등의 방법도 지칭하지는 않는다.


과거의 인물을 지금, 여기에 있게 하는 것.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답이 있는 건 아니다.

무엇일까? 이 고민이 현재의 나의 고민이다.


'허구'에 '현실'이 개입하는 거.

최근에 본 가장 적절한 방법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지금, 여기 실제 벌어지고 있는 뉴스가 스트리밍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야기의 마지막, 그 뉴스에 등장하는 난민들 중 한 명이 실제 이야기에 개입하는 것이었다.  



  

2021년 1월 2일 토요일

기쁨

창작의 슬픔은

창작의 기쁨으로

물리친다

썩 꺼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