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7일 목요일

연극 '바냐와 소녀'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안내원의 청녹색 자켓이 탐났다. 특히 깃부분만 푸른 빛으로 악센트를 준 건 정말 최고였다. 언제가 훔치겠다. 조심하기 바란다.

줄거리는 이렇다.
한 아저씨가 있다. 그에게 한 소녀가 나타나 결혼하잔다. 남자는 소녀를 사랑하지만 많은 나이 차이 때문에 거절한다. 10년 후. 남자는 후회한다. 소녀가(십년이 지났으니 더이상 소녀가 아니지만) 다시 나타나자 남자는 소녀에게 매달린다. 하지만 이젠 소녀가 거절한다. 그 후 시간들이 흘러가고 그들의 사랑도 변해간다.
'로리타'소재의 흔한 사랑이야기로 같지만 그렇지 않다. 본 연극은 관객을 다른 세계로 이끈다.

증거.
하나. 관객이 극장에 들어서면 남자는 텅빈 극장 바닥과 벽에 알수 없는 글과 그림으로 낙서를 하고 있다. 사실적 배경은 제거되고 관객은 거대한 소굴로 들어온 느낌이다. 극적인 조명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작업등이라 부르는 등이 몇 개 켜져 있을 뿐이다.(조명은 공연 내내 계속 그 상태로 유지된다.) 사실적 이야기를 표현적 배경을 통해 극을 진행하는 방식도 이젠 별로 놀랍지 않지만(영화감독 라스폰트리에의 '도그빌', 연극연출 이기도의 '하녀들') 이 연극은 이야기에서 배경이 계획된 게 아니라 우리가 보고 있는 배경에서 이야기가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둘. 역시나 소녀가 무대 윙 대신 극장 무대반입 출입문에서 살그머니 나타난다. 그리고 말한다. 드디어 이야기가 튀어나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소녀의 일상적인 말과 달리그녀의 행동은 뭔가 이상하다. 의도적인 시적 몸짓이 보인다. 이 몸짓은 일상적 행동을 하는 남자와는 상당히 다르다. 뭔가 불균질한 느낌이 등장한다.
셋. 소녀가 사랑을 고백한 뒤 남자에게 거절당하고 십년이란 시간이 흐른다. 하지만 본 공연에서 그 시간의 흐름이 보이지 않는다. 어떤 무대 기법도 그 세월을 물성이든 감성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단지, 배우의 말로서 설명될 뿐이다. 그런데 그 말에서도 세월은 느껴지지 않고 남자와 여자의 대사의 톤은 십년 전 그대로다. 시간이 제거된 것이다. 불균질한 그 무엇이 확실히 있다.
추론. 본 연극은 사실적 배경, 시간이 제거가 되어있다. 그 곳에 한 남자가 있다. 잠시 후 시적인 몸짓의 한 소녀가 벽에서 튀어나온다. 따라서 이 연극은 한 남자와 한 소녀의 사랑 이야기로 극을 진행시키는 것이 아니라 한 남자의 상태에서 극을 진행시키는 것이다. 한 남자의 상태, 즉 그의 머리 속, 소굴, 아니면 바다 속 같은 그의 두뇌 속에서 한 소녀를 등장시키는 것이다. 특히 극의 마지막 소녀가 이때까지 보여주었던 감정을 모두 제거해버리고 다시 살그머니 무대 출입문으로 빠져 나갈 때 그리고 남자가 처음과 같이 계속 극장 벽과 바닥에 낙서를 할 때 그 증거는 확실해진다. 이 연극은 관객을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외딴 곳에 망상에 사로잡힌 한 남자의 정신세계에 초대한 것이다.

작자가 생각한 본 공연의 줄거리는 이렇다. 외딴 곳, 망상에 젖어 있는 한 남자. 어느 날 그남자는 너무나 아름다운 한 소녀를 자신의 정신세계에 등장시킨다. 그 남자는 그 소녀를 사랑하고 만다. 하지만 소녀를 갖기란 너무 힘들다. 소녀도 나이를 먹고 철이 들고 가족이 생기고 늙어 가기 때문이다. 남자가 망상에 젖어 있는 이유가 은연 중 드러난다. 결국엔 사랑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렇게 허망한 한 사랑이 끝난다. 하지만 소녀는 자신이 탄생시킨 또 다른 자아. 남자는 또다시 낙서를 하고 아마 또 다른 자아를 탄생시킬 것이고 사랑할 것이고 애걸할 것이고 죽이고 싶을 것이고 결국엔 또 허망하게 끝나 버릴 것이다. 인생이 그렇듯.

지뢰. 펑!. 위의 모든 글은 작자의 주관된 해석이다. 솔직히 공연을 관람 중 어떤 불균질을 감지하고 집으로 돌아와 공연을 복귀하며 다시 생각해본 글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공연에서 나는 혹은 관객들은 무엇을 봤을까? 실제로 관객이 위에서 열거한 작자의 의도를 도출하거나 또 다른 의도를 파악하며 연극을 흥미롭게 따라갔을까? 내 생각은 부정적이다. 그러기에는 본 연극은 너무나 많은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또한 주제도 사랑을 애걸하던 두 인물이 극 중반 서로의 자식들을 연기하는 지점부터는 인생을 말하기 시작한다. 관객들은 애매해진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 왜 남자는 그 소녀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건가? 왜 남자는 그 소녀를 등장 시킬 수 밖에 없는 건가? 만약 본 연극이 작자가 위에서 열거한 한 남자의 정신세계 속의 이야기니깐, 또는 소녀가 허상이니깐 그 이유가 명확치 않아도 됨을 허용했다면 관객을 꼭 연극에 불러 올 필요가 있었을까? 연극이 아니라 추상의 세계를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회화, 설치, 무용으로 불러 오는 게 더 낳지 않았을까? 연극은 극 중 인물을 통해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쿠툼'을 관객에게서 불러 일으켜야한다. 그 '푼쿠툼'을 이끌어내기 위해선 극 중 인물을 관객에게 이해시키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 인물이 망상으로 빚어낸 허상이여도 말이다.

히치콕의 조언. 연극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영화감독의 명언. 서스펜스. 히치콕은 서스펜스를 단지 놀라움이 아니라 감정의 동요라고 말하였다. 또한 서스펜스가 일어나기 위해선 인물의 모든 정보를 관객들에게 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만 어떤 위기의 순간이 닥쳤을 때 관객들에게 인간에 대한 어쩔 수 없는 감정(연민, 사랑, 불안, 증오, 등등)이 생기고 그 감정이 고조되면서 극을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본 연극은 그런 서스펜스가 전혀 작동되지 않는다. 사랑에 대한 열망, 아픔의 순간들이 보이지만 남자가 소녀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제시되지 않음으로써 관객은 순각적인 감정의 동요 이외에 그 어떤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 예로 극 중 남자가 나체로 등장하여 늙은 자기 얼굴을 수술해 달라고 할때, 소녀가 남자의 빰을 계속 때릴 때, 관객은 순간의 놀라움과 당혹감은 느끼지만 더 이상의 감정은 발생되지 않는다. 만약, 남자가 그 소녀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명확한 이유가 관객에게 각인 되어있었다면 이 장면들은 관객들에게 더 풍부하고 깊은 감정을 불러낼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마지막 소녀가 실제가 아님을 알았을 때(작자가 생각한 이야기지만) 그 모든 행위와 망상이 한 남자의 엄청난 고독감에서 발생한 것임을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가지 더. 히치콕은 서스펜스를 위해 극의 모든 요소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였다. 위에서 말했듯이 본 연극은 극 중반 이후부터 사랑을 말하는지 인생을 말하는지 헷갈린다. 단순한 주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체홉은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얼마든지 인생을 말한다. 또한 배우들의 말과 행동들도 전반부와 틀려진다. 시적인 몸짓을 하던 소녀가 일상의 몸짓을 하고 일상의 말을 하던 남자가 추상적인 말들을 던진다. 모든 것이 불명확해진다. 관객은 더이상 극을 따가가기를 포기한다. 그 이후에는 무엇이 남아있는가?

본 연극이 살아 있는 순간이 있었다. '따르릉'. 서로에게 전화를 걸며 사랑을 열망하는 장면. 두 배우는 큰 소리로 '따르릉'대며 서로에게 으르릉 거리고 무대를 뛰어다니며 술래 잡기 하듯 통화를 하였다. 한 남자의 머리 속, 소굴 혹은 바다 속 이라는 무대 위에서 남자는 자신이 탄생시킨 소녀와 신체적 놀이를 하며 사랑을 갈구 하는 것이다. 다른 예술 장르에서 절대 볼 수 없는 연극만이 보여줄 수 있는 순간. 이런 순간들이 조금더 명확하게 컨셉화되고 계속적으로 표현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작가와 달리 연출가는 명확화와 단순화하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연출 자신이 느낄 수 있어야만 관객에게도 감정과 정서를 정확히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본 연극이 보여주는 사실적 배경, 극적인 조명, 시간성이 제거된 무대는 얼마나 훌륭한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가! 그 세계는 관객마다 각기 다르지만 연출의 의도는 분명한 하나로 녹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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