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외로움을 사랑보단 인스턴트 섹스로 해소한다.
관계에 집착하는 여동생의 등장.
여기서 대비되는 두 사람의 삶의 태도.
하지만 갈등은 보이나 드라마는 형성 되지 않는다. 단지 대위법으로 나열될 뿐.(이것은 연출의 부족이 아니라 철저한 의도이다.)
결국 여동생은 관계에 집착하고 마지막으로 오빠를 찾지만 남자는 섹스에 온 몸을 불사른다. 바싹 타 들어갈 정도로. 결국 집으로 돌아 온 남자에게 목도되는 여동생의 자살. 남자는 울분을 토한다. 하지만 여동생은 죽지 않는다. 그녀의 팔뚝엔 수번의 칼자욱 흔적이 있다. 매번 있었던 자살시도. 이 남자도 변하지 않을 것인가? 스톱.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 지하철에서 낯선 여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남자. 그건 유혹이 아니라 타인에게 던지는 처절한 외로움의 표시이다. 스톱. 제목이 왜 '부끄럼'인가? 이 영화는 타자에게 혹은 타인을 통해 느끼는 감정의 부끄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만들어낸 부끄럼을 말하는 것이다. 섹스 도착증. 그건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이며 집착이다. 그는 그것으로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다. 스스로 만든 부끄럼. 결코 사랑을 하지 못하게 할 감정의 차단, 파괴. 하지만 그 차단과 파괴는 단호한 것인가? 부끄럼은 결국 타인과 생길 수 밖에 없는 감정 아닌가? 복귀. 여기서 남자에게 일말의 희망은 있다. 모든 부끄럼을 걷어 냈을 때의 남자. 유일하게 외로움을 표시하던 순간. 마지막 지하철 안에서 남자가 첫 장면에 등장했던 낯선 여자를 다시 오래 동안 바라볼 때 여자는 빙긋이 웃으며 다가온다.
ps.
-도시의 거리를 걸으면 흩날리는 버스의 매연에도 외로움을 달랠 수 있다.
-구도와 때깔은 좋다. 영상으로 말하려는 것도 좋다. 하지만 무언가를 계속 강요하는 의도된 쇼트들은 영화를 살아있지 못하게 한다. 히치콕이 말한 감정이 없는 영화가 그런 것이다.
-도시의 거리를 걸으면 흩날리는 버스의 매연에도 외로움을 달랠 수 있다.
-구도와 때깔은 좋다. 영상으로 말하려는 것도 좋다. 하지만 무언가를 계속 강요하는 의도된 쇼트들은 영화를 살아있지 못하게 한다. 히치콕이 말한 감정이 없는 영화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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